찌질이

바로 얼마전에야 내가 어떤 인간인지 알았다.

나는 남이 나를 하찮게 취급한다고 느끼거나, 제대로 대접하지 못한다고 느끼면 언제나 사람을 쳐내는 인간이었다.
이 사실을 대충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직장도 오래 못 다니고, 대부분의 친구에게 절교를 선언한 적도 있고, 실제로 주변에 사람이 잘 없고, 여러 문제가 있는데, 가장 중요한 문제를 간과하고 있었다.
짐작 가능하겠지만.
남자문제.

변명 다 생략하고 말하면, 나는 남자를 휘두르기 위해 이렇게 할거면 이제 그만 보는게 낫겠다고 말하는 멍청한 미친여자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저따위 멍청한 말과 미친 정신상태로 남을 조종할 수는 없기에 내 인생은 엉망이었고
이런 짓을 15년동안이나 해왔으면 깨닫고 고쳤어야 하는데
언제나 그따위밖에 안되는 애들이라 내가 이따위로 대접하는게 당연하고
나는 옳았고 나는 아쉽지 않고 인간을 고쳐쓰는 일에 흥미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계속 이러고 살았다.

블로그 하던 7-8년간 내가 이런 성향이 있다는걸 한번도 안 쓴걸 보면
쓰면 욕먹을 짓이라는걸 어렴풋이 알고 있긴 했지만
그래도 내 딴에는 그럴 이유가 있어서 그러는거니까, 내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번에도 남자가 내 성에 차지 않자 그렇게 질렀는데
남자가 내 기분은 이해하지만 그렇게 결론내리기 전에 좀 더 좋게 내가 원하는걸 표현해야 하는거 아니냐고, 너무나 당연한 말을 했다. 자기가 무신경했던 것 같지만, 자긴 나름대로 노력한거고, 내가 뭐에 불만인지 알았으니 더 노력할 수도 있지만, 나는 별로 믿을만한 사람이 아닌 것 같다는 평가에 나는... 
할 말이 없어서...

아니라고. 네가 잘못 생각하는거라고. 사실 나는 아주 믿을만하고 신실한 사람인데! 나같은 사람도 없는데! 단지 그게 발현되기 위해서는 네가 이러저러한 인간이 되어야 하는데, 네가 그러한 인간이 못된건 네 탓이지 내 탓이 아니니까... 그리고 우리가 무슨 사이인데 서로 믿고 말고야... 

라고 마음이 외치고 있었지만, 머리는 알고 있다. 이것은 말싸움에서 지기 싫은 미친년의 논리. 전술에서 이겨도 전략에서 지는.. 어쩌면 이런 우기기로 얘 하나 이길 수는 있겠지만 영원한 미친년루저인생...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계속...


내가 미친년이라는 사실과, 남자가 생각보다 냉철하고 똑똑하다는걸 알게 되자 나는 남자가 많이 아쉬웠다. 그래서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고 생각하면서, 이렇게 내가 질러놓고 남자가 아쉬운건 처음이야. 이번 사건으로 나도 뭔가 배운게 있겠지. 라고 통렬한 반성을 시작했다. 남자 아쉬운걸 알았으니 다음에는 이러지 않겠지. 

그런데.

남자가 다시 마음이 누그러지는 것 같은 반응을 보이자, 좀전까지 아쉬워서 발을 동동 구르던 나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아. 진짜. 뭐야. 그럼 지가 이정도 반응을 보이면 내가 알아서 굽혀야해? 어쩌라고? 네가 뭐가 그렇게 잘났는데? 너는 이런것도 단점이고, 저런것도 단점이고, 이런건 진짜 나같은 애나 받아주는건데. 같은 언제나의 밑도 끝도 없는 아무래도 열폭에서 기인한 것 같은 쓰잘데기 없는 자존심이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30분 안에 냉탕과 온탕을 오고가는 급격한 감정변화라서. 나는 확실히 미쳤다는걸 알 수 있었다. 인간이 변덕스러울 수는 있다. 하지만 좀 긴 안목을 가져야 하잖아. 지금 내가 바라는건 뭐지? 얘랑 잘 지내는거? 아니면 앙갚음? 앙갚음이라고? 어떤 인간에게도 느끼기에 적절한 감정은 아닌데, 아무 사이도 아닌 몇 번 본 남자가, 내가 생각하는 만큼 나를 대접해주지 않아서 내가 그만보자고 하다가 무안해진걸 가지고 앙갚음을 하겠다고? 아악! 난 고등학교때도 이렇게 유치하지는 않았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유치찬란한 미치년이 된거야? 근데 이건 결코 지나치면 안되겠어. 나는 지금 30분안에 언제나의 나로 돌아가려고 하잖아. 앞으로 30분이 더 지나면 나는 얘를 한번도 아쉬워한 적이 없다고 생각할 것 같아.

그럼 지금까지의 나는 이렇게 해놓고 항상 만족했었나? 후회없었나?
후회한 적이 없다는 기억은 진짜인가?
...아니었다...
흑역사들이 아악....
그런데 모든 기억을 삭제하고 기가막힌 자기합리화로 여기까지...
자기합리화를 도운 것 하나는... 자기 성질을 이기지 못해 그만보자고 질러놓고, 아직 감정이 남아서 실수했다고, 아쉬워했던 적도 꽤 있고, 그중에 한두번은 다시 돌이키려고 찌질거리기도 했는데... 장기적으로 생각하자면 역시 다 후회없는 관계라... 하지만 돌이켜서 합리화하는건 좋지 않아. 인생을 그렇게 살 수는 없어. 지금 여기서 내가 원하는게 뭔지 봐야 하는데... 미친가하... 내가 진짜로 바라는게 뭐니...

단점 없는 완벽한 남자?
나가 죽어 나가 죽어 나가 죽어...
미친 B사감아. 그런걸 바라면 어떤 인간과 연애를 할 수 있겠니...
모든 인간은 다 단점이 있는데...


좋아. 
너를 공식적으로 후회한 두번째 남자로 인정한다. 첫번째 후회는 두번째 구남친이었는데, 나는 거기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고 지나갔고, 나머지 남자들에 대해서는 장기적으로 후회하지 않았기 때문에(그 당시의 행동이 아쉽고 미숙했지만 결국은 옳은 선택이었다는 합리화) 인간이 너무 발전이 없었던 것 같다. 물론 이 남자도 향후 수주일 이후 수정의 여지는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너는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되어야 해. 내가 언제까지나 이렇게 살 수 없어. 기록을 해놓고, 상담을 시작하는 12월 18일까지 이 문제에 대해서 좀 더 생각해봐야겠다. 지금 늙고 지쳐서 기운없어진 부모님과의 관계가 문제가 아냐. 물론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애착관계 이슈로 내가 이렇게 된 것도 맞지만, 시작이 거기라고 온갓 것들에 다 부모님 핑계를 댈 수는 없잖아.

첫번째 구남친이 진짜 내가 사귀어 본 애중 제일 그지같았는데, 그렇더라도 때리거나 돈뺏거나 욕한것도 없고 여자문제도 없으니 그다지 쌍놈은 아니다. 둘 다 너무 어려서 감정을 컨트롤 못했고, 이 새끼가 오빠라고 나를 휘두르려고 하다가 전투커플이 되었다. 그당시 나는 대학교 들어가면 누구나 생긴다는 남자친구가 일년간 생기지 않아서 역시 나는 못생기고 뚱뚱하고 멍청하고 매력없다고 훌쩍이고 있었는데, 잘생기고 똑똑하고 멋진 구남친을 사귀게 되서 매우 기뻤다. 드디어 나도 남들처럼 멋진 남친이 생겼다고 신나했지만, 내가 강남역에서 10시까지 놀고 있을때, 그새끼가 나보고 집에 빨리 들어가라고 했을때 내가 더 놀다 들어가겠다고 하자 걔가 "그럼 헤어져."라고 했다. 그새끼는 어떤 여자랑 어떻게 사귀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때도 어처구니 없다고 생각해서 헤어지겠다고 했다. 내가 그렇게 나올줄은 몰랐던 남자는 나를 다시 잡았고, 나는 이따위로 나를 협박하는 애랑은 하루빨리 헤어져야 한다고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아무도 좋아해주지 않는 나같은 애를 누가 또 좋아해줄지 모르겠으니까, 아쉬워서 얘를 사귀긴 사귀면서 헤어져를 삼일에 한번씩 남발했다. 네가 먼저 했잖아. 본때를 보여주지 나도. 네가 아쉬워서 사귀지만 그렇게 아쉽진 않아. 이런 마음. 

모두 헤어지라고 충고하는데도 개같은 연래를 꽤 오래 지속하다가 드디어 헤어지고 잠시의 공백을 거쳐 너무나 멋진 두번째 구남친을 사귀게 됐다. 사귄지 한달만에 남자가 내가 원하는 연애를 해줄 것 같지 않자, 전 연애에서 그지같은 것만 배운 나는 우린 안되겠다고 그만 보자는 말을 했다. 당시의 마음은 사실이기도 했다. 나는 가족에게도 누구에게도 어떻게 애착관계를 형성하고, 어떻게 원하는 것을 현명하고 좋게 말할 수 있는지 배우지 못했고, 거절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 근데 이 남자도 내가 그런 불만이 있는 줄 몰랐다고 자기에게 생각할 시간을 달라는 멋진 말로(난 남자의 침착한 태도에 약한 듯) 내 심장에 불을 지르다가 더 노력하겠다고 말을 했다. 나는 이번에야 말로 성숙한 연애를 하는구나 하늘을 날 것 같았고, 저 사건이 있고 일이주 정도 지나서 남자가 다시 내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하자 이번에야 말로 예쁘고 착하게 내가 원하는 바를 이야기하다 너무 바라는게 많다고 차였다. 엉엉엉엉. 그때 붙잡고 늘어졌어야 하는데 진짜 심장 떨어지고 서늘해지는걸 느끼면서 '알았어.'라고 개쿨하게 끝내고, 일주일 뒤에 다시 자존심 세우면서 찌질거리다가 다시 차였다.


이게 스물 한살때의 일이고, 그 뒤로도 몇 번의 연애를 했는데, 나는 그 시간 동안 한치도 자라지 않았나보다.

연애 패턴도 문제지만, 사람을 만나면서 장점을 발견할 생각을 하지 않고, 언제나 단점을 캐내면서 '얘는 이래서 안되겠어', '쟤는 이래서 안되겠어.'라고 언제나 좀 더 멋진 꿈속의 왕자님을 만날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기분이 거슬리면 단번에 쳐내려고 하는 나의 태도도 문제고... 아니 어떻게 말하면 내가 거절당할 것 같으면 내가 먼저 거절하는 소극적인 공격성이기도 한데...


쿨한 인간이 되고 싶어서 안달복달한 지난 15년의 세월이 덧없다.
찌질이.




덧글

  • 2014/11/17 13:18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4/11/19 10:59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4/11/17 14:00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snow 2014/11/17 16:39 # 삭제 답글

    허허 저도 찌질인가봐요.. ㅋㅋ
    그래도 계속 실패를 하다보닌까 하지말아야 할 일을 참는법이 생기더라고요.
    근데 저는 제 실수(?)도 원인이었지만 운없게 안맞는 사람들을 연속으로 만났던 것도 있는것 같아요.

    저도 가족들과의 트러블 + 쉽지않은 연애+ 주변사람 등등 일이 있었지만 '어쩌면 이 모든게 다 내 잘못(단점때문)은 아닌것 같아'라고 생각하닌까 마음이 편해졌어요.
    제가 어느정도 노력을 해도 단점이 보이고 불편한 사람들은 거리를 두려고 해요..

    가하님 제가보기엔 전혀 소극적이지도 공격적이지도 않고 멋있게 살고계셔요! :)
  • 가하 2014/11/19 11:00 #

    실패에서 배울 때가 있고, 아무것도 못 배울때가 있는데 제가 너무 못 배운 것 같아요. 불편한 사람 거리를 두는건 제가 너무나 잘하는 일이니까, 조금 불편한걸 참는 걸 배워야 하는데 으아...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좀 더 부드럽게 살 수 있게 노력하려고요.
  • 2014/11/17 23:16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4/11/19 11:07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4/11/18 01:45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4/11/19 11:11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4/11/18 10:14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4/11/19 11:13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4/11/19 15:26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4/11/24 10:16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하아 2016/05/05 17:18 # 삭제 답글

    다 내마음 그 순간의 내심정들.. 내가 한 연애 비슷햇던것들의 이야기같아요 읽으면서 마음아프다..
  • 그리고 2016/05/05 17:36 # 삭제 답글

    가하님 타협안하고 잘헤어진거 같아요 제 인생의 간접 직접 경험상 내가 잘못하고 큰소리 빵빵쳐도 날 정말 좋아한다면 남자가 지고 죽는 시늉이라도 해야되.. 냉철한 거 같아 보이는 놈들도 진짜 예쁘거나 자기가 아쉬운 여자한테는 그렇게 하더라ㅜ 날 그만큼 좋아ㅘ지 않는다면 필요없어.. 글타구 진짜 내가 원하는 반응이 나오는 남자는 음.. 내가 아니라도 너는 여자가 아쉬워서 다른 여자들한테도 이럴거야 하는 맘이 들게하는.. 그래서 더 비참한?ㅋㅋ. . 결론은 그냥 나혼자 욕망없는척 하면서 혼자 살고싶은데 사랑받고 사는 여자들 보면 또 혹시나 하게되고 아쉬워지고 점점 어렷을때는 재고의 여지가 없던 수준들도 수용하게 되고 하핳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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