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때까지 어버이날이 그렇게 중요한줄 잘 몰랐는데, 집 밖에 나와 사니까 이런 날이라도 있어야 지생각만 하고 살던 자식새끼들이 한번쯤 엄마아빠 생각을 하겠구나 싶다. 나는 요즘 좀 바쁜데-내가 블로그에 한가하다고 썼던적이 한번이라도 있는지 궁금하지만-모처럼 어버이날을 맞이하야 내일은 칼퇴근 하는게 어떻겠냐는 제법 그럴듯한 의견을 내새워 사람들의 동조를 받았다.
엄마는 오늘 항암치료로 방사선조사를 받고 금요일날 전신스캔을 하기로 되어 있다. 오늘부터 일주일 동안 사람들은 엄마 1m 이하로 접근 금지. 한시간 이상 같은 공간에 있지 말기. 초등학생 이하는 아예 접근금지. 엄마는 음식 조리금지. 아파서 죽는게 아니라 외로워서 죽겠다.
내일 칼퇴근 허락을 받고 오늘 엄마한테 다소 전화해서 뽐내면서 내일 집에서 저녁을 먹을거라고 말했다. 엄마는 매우 황송해 하면서 '엄마 내일 저녁 못하는데...'라고 말했다. 내 이미지는 집에 밥만 먹으러 가는 그따위 이미지인가?
엄마와 다소 희희낙락하면서 내일 보자고 전화를 끊었는데 한 서너시간 지난 후에 아빠한테 전화가 왔다. 아빠는 엄마 몸도 아프고 제대로 식사도 못할 것 같은데 굳이 올 것 없다고, 원래 집에 우환이 있으면 생일도 안챙기는 법이라고, 뭔가 멋들어진 것 같은 말을 권위있게 하셨다. 내가 싫은건지, 내가 힘든게 싫은건지 헷갈리면서 '리젝트 당했다!'라는 가벼운 충격과 함께 아빠한테 공손하게 그럼 일요일날 집에 가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래. 니 마음만 받겠다."
아빠는 이렇게까지나 어색하게 말씀하셨다. 뭐야. 저거. 연극체 아냐? 진짜로 아빠가 딸한테 쓸 수 있는 말이야? 우리 좀 어색하긴 하지만 그래도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정말로 멀어진 기분을 느끼며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난 마음만 주는 사람이 아니다. 내 마침! 이럴 줄 알고 준비한 게 있었지.
짜잔.
꽃이다. 꽃.
내가 전에 엄청 못되쳐먹게 꽃배달이 싫다는 이런 글을 썼던적이 있었다. 기본생각은 그때와 변함없지만 하나 더 인정하겠다. 내가 꽃을 싫어하더라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꽃으로 인해 행복해진다면, 쑈를 하라. 꽃배달은 쑈다. 과시고. 뭐. 그러니까 쓴귤님이 그때도 알았던 사실을 내가 조금 더 늦게 이해했거나, 이제야 내가 바라지 않더라도 남이 바라는걸 해줄 마음이 생겼거나.
눈치빠른 아첨꾼이며 속물인 나는 안다. 내일 아빠 회사로 꽃배달이 가면 사람들이 '종님 딸은 예쁘고(날 본 적없음) 똑똑하고(나랑 만난 적 없음) 착하다더니(날 안 적 없음), 완전 효녀네요. 종님은 좋으시겠어요'라고 말할꺼고, 아빠는 '에이! 이자식은 나이먹어서 돈 모을 생각도 안하고 매 쓰잘데기 없는데다만 돈을 쓰고 있어! 오늘도 바쁜데 우리 보러 굳이 집에 온다는거, 내가 오지 말랬지. 에이. 이자식은!'이라고 말하겠지. 그 다음에 '케잌은 자네들 나눠 먹게.'라고 하겠지. 어쩜 '나도 한 조각만 먹어보지.'라고도 할거야. 그럼 아빠의 회사사람들은 케잌을 나눠먹으면서 이번에야말로 진짜 내 칭찬을 하겠지. 케잌이 맛있을꺼거든. 내가 하고많은 업체중에 라피오레를 선택한건 ARoo케잌을 매달해주기 때문이라고.
물론 내 예상이 빗나가 아빠가 내가 진짜로 쓰잘데기 없는 짓을 했다고 화를 낼 수도 있겠지만, 난 시다바리의 힘을 믿는다. 씨님이 돈도 없는 주니 영이가 마사이 워킹 구두를 선물했다고 우리에게 얼마나 욕햇던지. 그때마다 내가 혀가 꼬일 정도로 얼마나 칭찬했는지. 너네도 그래야해. 너네도 그래야해. 내가 그러라고 케잌도 일부러 같이 주문했는데. ㅠ_ㅠ
그러고보니 나도 지난 주말에 아빠한테 선물을 받았다. 겔랑의 메테로라이트 리필. 엄마가 부탁한건데, 나랑 동생한테도 하나씩 사줬다. 나는 부탁도 안했는데 이런걸 선물해주는 아빠가 너무 고마웠다.
"아빠. 나 깍 없어요. 왜 깍은 안줘요? 깍도 사줘요."
"깍은 비싸다. 엄마꺼에서 껴서 써라."
그게 말이 되냐고. 화장품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도 있겠지. 이건 나한테 후방센서를 사주면서 필요하면 엄마차를 운전하라고 하는거랑 똑같다고. 가끔 자동차 없어도 혼자 후방센서 가지고 놀 수도 있겠지. 뒤로 걷는다던지. 장난하냐고. 전에 샤넬 넘버파이브로 똑같이 하지 않으셨냐고. 그것도 리필이 세개 한세트였다는거 누가 모르냐고.
아빠는 항상 이런식이다. 옛날에 아빠는 딸내미들이 베스킨라빈스를 좋아한다는걸 눈치챘다. 가끔 술을 드시고 버스를 타고 집에 오는 날이면 버스정류장 앞에 있는 베스킨 라빈스에 들어가서 물어봤겠지.
"자. 뭐 하나 물어봅시다. 여기 어떻게 사가는게 좋습니까?"
베스킨 라빈스에서도 점원 교육을 하겠지. 이렇게 봉같아 보이는 아저씨가 들어오면 제일 비싼걸 안겨라. 이름도 찬란한 패밀리 팩. 파인트 4개가 한셋트.
"가족분들이 드시기에는 패밀리 팩이 좋죠."
이름도 딱 가족용이다. 패밀리 패밀리 패밀리. 그럼 아빠는 이렇게 말했겠지.
"그럼 우리 이렇게 합시다. 하나는 바닐라. 하나는 쵸코. 하나는 아몬드 봉봉. 하나는 딸기."
나는 초반에는 이 바닐라나 초코를 파고 들어가면 다른 맛이 나올거라고 기대했지만, 몇 번 지나지 않아 파인트 네 통을 다 펴놓고 아이스크림을 퍼먹기 시작했다. 엄마와 아빠는 저게 한꺼번에 네개를 다 먹는다고 기함을 했다. 뭐 가끔은 네 개 다 먹는 날도 있었다.
취향차이와 무지와 기타 등등으로 인한 거추장스러운 것들이 함께 하더라도, 마음만 받아야 한다. 마음만.
걱정된다. 나 진짜로 혼나면 삐질텐데.


